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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 Antoine Preziuso at Montres Korea

이 인터뷰는 <시계매뉴얼>에서 기획, 몽트르 코리아에서 함께 참여해서 공동 취재한 것이다. 이 인터뷰의 일부는 <몽트르 코리아> 12월호에 들어갔으며 현재 위 잡지는 이미 출간된 관계로 들어간 내용을 동시 공개한다.  나머지 여분의 인터뷰와 사진은 곧 발간할 <시계매뉴얼> 2호에 개재할 예정이다. 사진과 인터뷰 내용의 무단 발췌와 개재는 법으로 금지한다.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 2015년 서울 전시를 준비하면서 관심이 갔던 시계는 앙트완 프레지우소의 뚜르비용 오브 뚜르비용즈 시계였다.  실제 서울 전시 중에도 그의 시계는 관람객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었다. 이미 3개의 뚜르비용을 탑재한 시계를 소개했지만 이렇게 3개가 동시에 돌아가고 이를 탑재한 다이얼판 자체가 또 돌아가는 시계, 이름처럼 뚜르비용의 뚜르비용이라 부를만했다. 역사가 오래되고 규모가 큰 그룹사 소속의 시계 브랜드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지만 현존하는 독립 시계 제작자가 이끄는 작지만 독창적인 시계 브랜드에 관심이 많았던 만큼 그들을 직접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지난 10월 하순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 시상식에 참여하기 위한 여정에 그의 공방 방문을 기획했다. 그 후  10월 26일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의 제네바 전시에서 그와 함께 시계를 만든 그의 아들 플로리안을 만날 수 있었고 27일 오후 제네바 근교에 있는 그의 공방을 직접 방문할 수 있었다. 다음은 <몽트르 코리아>에 개재된 인터뷰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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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트완 프레지우소는?

1957년 스위스 제네바 태생으로 1973년 제네바 시계학교 the Geneva Watchmaking School에 입학, 1978년 졸업 후 파텍 필립을 거쳐 1980년 앤틱쿼럼에서 복원가로 일했다. 1981년 그 자신만을 공방을 열고 복원과 시계 제조를 시작, 1991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첫 시계를 선보인 이래 지금까지 독립 시계제작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올해 소개한 뚜르비용 오브 뚜르비용즈 시계는 1분에 1회전하는 3개의 뚜르비용, 그리고 이를 탑재한 다이얼이 또 한번 10분에 1회전 하는 방식으로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에서 혁신 시계상과 대중들이 직접 투표하는 인기상의 2개상을 동시에 석권했다.

 

어떻게 시계제작자가 되고 싶어했나?

제네바에서도 시계제작으로 유명한 곳에서 태어났다. 집 근처에 시계 제작 공방이 많았고 그들을 보며 자랐다. 아버지도 시계제작자였는데 어느 날 무브먼트를 보여주며 ‘앙트완, 원한다면 나사를 하나 빼서 다시 끼워보렴.’이라고 말했고 그렇게 부품을 빼고 다시 조립하면서 시작했다. 집에서 20~30m 거리에 제랄드 젠타의 첫 작업실이 있었는데 그는 내게 시계학교에 꼭 가야하고 졸업하면 같이 일하자고 했다. 그래서 제네바 시계학교를 갔고 실제로 그와 함께 일하기도 했다.

가장 큰 영감을 준 시계제작자가 있다면?

페르디낭 베르투Ferdinand Berthoud,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Abraham-Louis Breguet, 줄리앙 르호이Julien Le Roy 등이다. 그들이 남긴 책과 실제 시계들에 영감을 받는다. 몇 백 년 된 시계를 살펴 보노라면 시간이 멈춘 듯 과거로 돌아간다. 지금처럼 전깃불도 없이 오로지 햇빛과 촛불에 의지해 무딘 도구와 정제하지 않은 기름을 사용해 제작한 시계들을 탐구하다 보면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간다.

1970년대 말 시계학교를 졸업했을 당시 바로 쿼츠로 인한 위기의 시대가 불어 닥쳤는데 시계제작의 길로 들어서기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졸업하자마자 많은 시계회사들이 파산하고 문을 닫았다. 어느 누구도 시계제작자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랭크 뮐러 등 친구들과 모여 고민했다. 젊은 우리도 쿼츠 세대였고 쿼츠를 좋아했다. 그러나 다른 길이었다. 기계식 시계 제작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직업이 시계 경매 회사 앤틱쿼럼에서 오래된 시계를 복원하는 일이었다. 모든 세대의 시계를 접할 수 있었고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혀야 했다.

처음 복원한 시계를 기억하는가? 러시아 크렘린 궁 안에 있는 시계를 복원한 일도 유명하다.

1690년 이탈리아에서 만든 회중시계. 모두 철로 제작했고 탁상시계처럼 컸다. 크렘린 궁 안의 시계를 수리한 일은 지금도 생생하다. 1917년 혁명 이래 어떤 시계제작자도 그곳을 방문한 적이 없었는데 그곳에 가서 큰 방들을 오가며 20여 개의 시계를 고쳤다.

독립 시계제작자의 경우 자신의 이름을 내건 회사를 누가 이어갈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앙트완 프레지우소의 경우 아들 플로리안이 뒤를 잇고 있는데 아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는가?

전통을 계속 이어가는 일이다. 후손에게 시계제조에 관한 기술과 철학을 전승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이를 즐겁게 해나가길 원한다. 때론 매우 괴로운 일이므로 본인 스스로 즐거워야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어떻게 시계에 입문했는가?

플로리안의 경우 더 빨랐다. 그가 태어났을 때 나는 집에서 작업했고 그는 1~2세때 내게 와서 내가 하는 일을 궁금해했고 하고 싶다고 떼를 썼다. 그런 그를 책상 앞에 앉히고 ‘자, 움직이지 말고 이 안을 잘 봐’라고 하며 무브먼트를 보여줬는데 그 뒤로 엄청난 질문 공세를 해댔다. 아버지가 내게 했던 것처럼 나도 그에게 시계 부품들을 줬고 카펫 위에서 그것들을 가지고 놀았다. 십대의 그가 어느날  ‘아버지, 저는 모토바이크를 만들겠어요.’ 라고 말했고 나는 찬성하며 그를 모토바이크 만드는 작업장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나는 냄새나 작업시 손이 더러워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그 후 다시 내게 와서 ‘아버지와 같은 일을 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그것이 아버지나 다른 가족들이 모두 행복해지는 길임을 깨달았어요.’라고 다시 말하곤 결국 내가 나온 제네바 시계학교를 들어갔다. 당시 나는 그 학교의 선생이었고 제자로 들어와 배운 그는 지금 그 학교의 선생이 되어 있다. 세대를 거쳐 물려 줄 수 있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일이다.

올해 제작한 뚜르비용 오브 뚜르비용즈 시계의 경우 아들과 작업해 특별히 용두에 AFP라는 이니셜을 새긴 것으로 안다.

이 시계는 아들 없이는 제작이 불가능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 가운데 트리플 디퍼런셜 기어 triple differential gear 부분이다. 이 장치가 3개의 뚜르비용이 각각 공진성resonance을 가지며 균일하게 움직이게 만든다. 아이디어는 내가 냈지만 구현하는데 힘들었다. 그래서 한동안 이를 내버려두고 아내와 호주로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그가 전화로 반드시 이 일을 계속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래서 만들어 보라고 했다. 첫 프로토타입을 시작으로 3번째 프로토타입을 제작해서 내게 보여줬다. 이 과정에 2년이 걸렸다. 뚜르비용이 1~2개 멈추더라도 나머지 뚜르비용이 멈춤 없이 작동하며, 균일한 속도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여러 개의 뚜르비용을 시계 하나에 넣은 것까지 3개의 특허 기술이 담겨 있다.

뚜르비용 다음으로 집중하고 싶은 컴플리케이션이 있는가?

뚜르비용은 만들기가 매우 힘들지만 마법과도 같은 존재, 마치 태양계와 같다. 지금 미닛 리피터로 작업하고 있고 내년 즈음에는 문페이즈, 스카이차트가 들어간 작업을 구상하고 있다. 가격도 좀 낮춰 보려고 한다. 페이스북 등 소셜 네트워크를 곧잘 하는데 아주 많은 젊은이들이 ‘시계 가격이 얼마인가요?’라는 질문을 곧잘 한다. 그들은 뚜르비용이 뭔지 모른다. 그저 시계를 사랑해 물어보는 것이다. 아마 500~1,000스위스프랑(원화 60~120만 원선) 정도면 구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시계 가격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제작하기에 아주 많은 시간과 노력, 투자가 필요하기에 어쩔 수 없는 결과다. 그러나 그들과 교감을 통해 아이디어를 나누고 조금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계를 제작할 수 있지 않을까 구상도 해본다.

딸도 주얼리 디자인을 전공해서 모두 함께 일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반지와 목걸이 등 주얼리를 제작하지만 동시에 시계 디자인도 하고 있다. 뚜르비용 오브 뚜르비용즈 시계의 주얼리 버전을 주문 받았는데 150캐럿의 다이아몬드와 300g 넘는 금이 사용될 것으로 예상하는데 주얼리 부분은 딸이 작업할 것이다.

시계 브랜드 앙트완 프레지우소를 지탱하는 철학, 추구하는 방향은 무엇인가?

시계 제조의 예술. 현대적인, 컨템퍼러리 시계 브랜드가 많아지고 있다. 그건 내게 마치 UFO와 같다. 앙트완 프레지우소는 보다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시계 디자인은 현대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뚜르비용이란 장치부터 세부 마감과 조립 등 모두 전통적인 기술을 그대로 담고 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미래의 고객들이다. 이 시계를 우리 다음 세대가 경매를 통해 구입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 만약 시계가 고장 났다면 반드시 수리되어야 한다. 10년, 50년, 100년이 지나더라도 말이다. 시계제조는 단순히 시계를 제작하는 데에만 있지 않다. 역사와 전통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연결고리를 만드는 일이다. 그것이 시계제조의 예술이다.

내년 SIHH에는 크리스토프 클라레, 로랑 페리에와 같은 시계제작자들이 고급 시계 박람회에 참여한다. 왜 동참하지 않았는가?

한때 10여 명의 직원을 두고 시계를 제작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내, 아들, 딸과 함께 일한다. 때때로 전시에 참여하지만 점점 더 소량 생산으로 가고 있고 유니크한 고객을 위한 유니크한 시계 제작을 모토로 독립 시계 제작자로 남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시계 속 세계를 탐구하는 일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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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함께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 2015년 시상식에서 그는 “이 상의 수상은 제게 큰 의미를 가진다. 아들과 함께 작업한 첫 결과물이기 때문이다.”라며 아들에게 상을 전했고 아들은 제네바 시계 학교의 스승에게 감사를 표했고 두 부자는 마지막으로 독립 시계제작자 협회의 30주년 축하로 인사말을 마무리했다.

공방 안에 가득했던 그의 수집품과 시계들에 관한 설명 등 여분의 인터뷰와 사진은 <시계매뉴얼> 2호에서 만날 수 있다.

All Photos & Contents © Manual7 & Chaehun Lim of 2R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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